동베를린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에 위치한 빌라 하이케(Villa Heike)에서 조주현 작가가 “기억 ; 오버제”(„Memories ; Obersee“)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빌라 하이케는 동독의 ‘국가 보안부’라 불리던 슈타지 옆에 위치해 있으며, 독일 분단 시절 동독 정부에서 감시하던 사람들의 모든 개인 정보를 서류로 보관하던 건물이다. 작가는 동독의 정부기관이 모여 있던, 동베를린의 과거를 고스란히 읽을 수 있는 리히텐베르크에 거주하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전시는 개인의 삶과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개인의 역사와 도시의 역사가 만나는 소통의 장이기도 하다.
‘역사적’이라면 굉장히 거대한 맥락으로 다가오지만, 다름 아닌 작고 사소한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공간의 특수성을 구성하며, 역사적이라는 수식어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이기도 하다. 전시는 굉장히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작가가 가장 먼저 집중하는 것은 그가 감각하는 것 자체이다. 그는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 그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기분을 탐구하며, 마치 기체처럼 된 감각을 한지 위에 쌓아 기억의 공간을 재구성한다. 재구성된 기억의 공간은 극도로 섬세한 붓질 자체로 재현되기도 하며 입체적 회화로 공간에 우뚝 서기도 한다. 바닥에 물이 조각조각 흐르며, 벽에서 풀들이 솟아난다. 자연에 테두리를 치고 명확한 경계를 넣는 행위, 그리고 바람과 같은 보이지 않는 자연을 초현실적으로 대상화하여 표현하는 행위는 한국화 작가로서 조주현만이 가진 독특한 특색이다.
우리는 나날이 새로운 감각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새로움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우리가 기억하는 감각 안에서 새로운 경험을 어떻게 정의할지, 어디에 분류할지를 사유한다. 반면 반복되는 감각 경험들을 묶어 우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새로운 범주를 창조한다. 그리고 반복 안에서 다양성을 창조해 낸다. 반복 안에서 새로움을 찾는 것이다. 전시는 이러한 개인 내면의 행위 자체를 그의 삶에 가장 가까이 있는 공간 오버제를 통해 주제화하고 있다.
전시장을 들어서면나무가 돌고 있다. 채색된 스티로폼. 계단을 따라 오르면 나무 뒤에 가려졌던 프로젝터 영상이 눈에 들어온다. 오버제에서 일어난 가상의 사고다. 화면 위의 장식을 지나 문을 따라 큰 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정면에 보이는 것은 높게 걸린 하늘이다. 동시에 미스터리한 사운드가 홀 전체를 떠돌아다닌다. 이곳에서 우리는 밝은 하늘과 노을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눈을 돌려 오른편 벽에는 스투코들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입고 있다. 단절과 연속이다. 전시장을 들어섰을 때 우리는 길을 잃은 느낌을 받는다.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닌, 혹은 복도를 따라 작품이 진열되어 있는 것이 아닌 커다란 정사각형의 방에 하나의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사유를 멈추고 감각화된 기체의 기억을 그대로 감각한다. 그렇게 작가의 재현을 통해 우리만의 기억을, 공간을, 감각을 잃어버림 그 자체로 두고 관조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2. „사유를 놓아 보는 건 어때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빌라 하이케는 베를린 역사의 중요한 일부로서 근래 들어 독일 공영방송 Rbb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세대인 것처럼 보이던 한 관람객과의 일화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방송을 통해 이 공간에서 전시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인 작가의 전시가 맞는지, 여기 이 지역이 유대인 지역이라는 것, 그리고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아는지, 그런데 이 공간에서 한국인 작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그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갈등을 언급하면서 이 지역이 유대인 지역이라는 말을 하고 이 전시는 필시 이 지역의 문화에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며 방문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베를린도 유럽의 문화도 아닌 한국화를 만났다. 그는 이 작업이 우리에게 왜 필요했냐는 것이다. 그리스식의 기둥과 스투코들은 유럽의 고유한 문화인데 그것을 한국으로 가지고 가서 소개하거나 선보이려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 유럽의 문화는 직접 가지고 가서 선보이거나 새로이 소개해야 할 선진 문물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다름 아닌 이곳 베를린이며, 그 이유는 다양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에서 우리가 느끼고 감각하는 것들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수고에는 필시 그 재현 활동 자체로서만이 합리화 될 수 없는 어떤 이면의 목표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이곳이 다름 아닌 작가의 삶의 공간이며, 공간과 삶의 순수한 연관성을 찾는 작업이 다름 아닌 작가의 과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전시가 이 건물과의 접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건물 자체에 관한 것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러한 활동이, 작가의 작품이 이 공간을 흐르면서 재창조해내는 가치는 무엇이고, 이러한 관람객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말을 걸고 있는 것인가? 한국인과 독일인의 정치적인 이해관계도, 문화적인 상관성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지금 여기는, 이 공간은, 또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꼭 해야만 했을까?
3. 기억을 감각하기 위하여
전시장에 들어선 우리는 공간을 사유한다. 존재를 정의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개인적 공간으로서 지금의 여기가 우리의 존재 전체를 관통하는 유일한 단서는 아니다.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마치 굉장히 개인적인 것 같은 작은 공간조차도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개별 요소들 그리고 자연적 환경이 결합되어 특유의 분위기와 맥락을 갖는다. 개인이 존재하는 공간이 단지 개인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는 과정, 즉 개인적인 것의 탈개인화와 그리고 공동화 과정은 개별 존재들이 타인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한 필연적이다. 우리는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늘 소통하기를 욕망한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존재를 정의하기 위함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가치 그 이상을 원한다. 자신만이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나의 친애하는 오버제>를 본다. 모든 사유의 과정과 사유를 거친 소통의 과정 이전에 우리를 가장 먼저 자극하는 것은 감각함 그 자체이다. 우리는 감각하고 자극을 받아 사유하기 시작한다. 감각 이전에는 사유가 불가능하다. 자신이 기억하고 감각했던 것을 다시 붙잡는 과정은 사유를 향한 첫 번째 단계이다. 사유를 향한 모든 기억의 재감각화, 그것이 작가의 작업에서 읽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맥락인 것이다. 이 전시장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각기 다른 욕망을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교류하는 장소이자, 자신만의 욕망을 실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는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변화하고 있다. 감각하고 있다. 감각은 기억으로 남고 작가는 다시 기억을 감각화한다. 감각화된 기억 즉 재현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소통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확인한다. 각기 다른 주체가 같은 시간에 경험했던 서로 다른 공간성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소통하며, 공감한다. 공감은 단순한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다름을 사유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 모든 과정들은 가장 단순한 그리고 가장 원초적인 감각함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있는 이 장소, 빌라 하이케의 <기억; 오버제>에서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각자에게 있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상황에 따라 잊고 넘기기도 하고 참기도 하며 그냥 흘려 보내기도 한다.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기억들, 강렬함이 있다. 아니면 반복되는 일상을 변주하고 싶은 욕망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코로나19로 방에 갇힌 우리는 매일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간다. 자기와 타자가 경험하는 대상이 같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각자에게 의미하는 바는 다르다. 가장 어두운 동베를린의 겨울 거리에서 우리는 우연히 빌라 하이케의 큰 창을 통해 그만의 화려한 색채와 리듬으로 재현된 기억의 감각들을 마주치게 된다.
● 비평가 소개
임 보 라
홍익대학교 미학과에서 발터 벤야민과 독일 낭만주의를 연구했고, 베를린 자유대 철학과에서 환상과 숭고 그리고 감정과 행위를 주제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독일 베를린에서 번역가이자 프리렌서 큐레이터, 그리고 비평가로서 활동중이다.